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유시 참변 (문단 편집)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가 사살되었다? === 자유시 참변에 대해 유념할 점은,당시 사살된 [[사할린 부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윤상원, 러시아 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韓國史專攻 2010. 2, 207-208] 왜냐하면 임시정부 명의로 설립, 운영된 군대는 그로부터 약 20년 후 창설된 광복군이고 당시에는 광복군이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자유대대측에서는 [[사할린부대]]와 전한군사위원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상해임정]]을 추종하는 세력이라고 몰아세웠다.이는 자유시사변 이후 군정의회와 자유대대 측으로부터 나온 각종 문서와 회고록에서도 계속해서 주장되고 있다.그러나 이러한 비판 역시 타당하지 않다.자유시로 집결한 무장부대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상해임정]]과의 관계 속에서 이동해 온 것이 아니라 [[이동휘]]를 위시한 한인사회당과의 관계 속에서 이동했다.''' 더구나 전한군사위원회가 조직되고 '''무장부대 통합운동이 실질적으로 전개되고 있을 때에는 이미 이동휘가 국무총리직을 사임한 상태였다'''.607)하지만 군정의회와 자유대대 측에서는 [[사할린부대]]를 상해임정과 연결시키려 했으며 심지어는 위임통치문제로 논란을 일으키고 있던 이승만과 연계시키기까지 했다.예를 들면 최고려는 자서전에서 이동휘가 “이승만의 승낙을 받아 ‘한인공산당’을 제꺽 만들어”냈으며,“이 상해공산당의 사상적 고무자들은 일제와 미제의 이름난 주구들인 장덕수,송진우,김성수,이승만 및 기타”라고 왜곡했다.608)이상 자유대대의 공격은 상해임정이 조선의 독립과 무장부대 통합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고려하지 않은 채 상해임정이 부르주아지들의 반혁명기관이라는 근거없는 전체 하의 비방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군정의회와 자유대대 측이 일반 군인들에게 발표한 거의 모든 문서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상해임정]]에 대한 성토가 있는데 반해609)코민테른과 소비에트러시아 정부에 보고한 보고문에는 [[사할린부대]]와 임시정부의 관계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610) '''즉 [[사할린부대]]와 상해임정의 관계는 군정의회 상층부에서도 부인하고 있었으며,일반 군인들에 대한 선전용으로만 이용되었던 것이다'''.그러나 무장충돌의 가능성까지 있던 상황에서 상호 비난은 일반 군인들에게 별다른 검증없이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보인다.일반 군인들은 급박한 정세 속에서 이러한 비판들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선별적으로 수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韓國史專攻 2010. 2, 207-208 사살된 사할린부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대라는 건 당시 떠돈 유언비어였다. 2017년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편찬한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에서도 상해 임시정부 봉대 날짜를 1921년 3월까지를 한계로 봤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서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7, 98쪽] 오히려 이들은 사회주의 지향의 군대였다. >사료에 다소 과장이 있을지라도 자유시에 모인 군대의 대부분은 사회주의적 지향을 갖고 민족해방운동과 함께 사회주의혁명을 동시에 추구했던 군대였다고 말할 수 있다.507)그러나 표면적으로 사회주의를 지향했다고 하더라도 각 부대의 성격은 이질적이었다.당시의 무장부대들은 “하나의 집중권 있는 기관 아래 조직된 의병단체는 아니고 각기 지방에서 개별적으로 조직되어 상호간에 지휘복종의 권리와 의무가 없었”508)던 상태였다.일제에 반대하고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지만,각 부대들의 이질적인 경험은 군사적 통합을 어렵게 했다. >----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韓國史專攻 2010. 2, 175 '''[[김구]]의 [[백범일지]]에는 자유시 참변에 대한 언급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아래의 도진순 교수(대표적인 김구 전문가)의 답변에 의하면 김구의 [[반공주의]]는 자유시 참변과 관계가 전혀 없다. [[사할린 부대]]의 여러 [[전쟁범죄]]가 드러난 후에 보면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김구]]가 [[김립 피살 사건]]으로 비난받는 게 형평성에 문제가 있을 지경이다. 김구는 [[독립운동가]]가 된 이후 적대적인 정치인을 대상으로 했을 뿐이지 민간인을 대상으로 폭력을 휘두른 적은 없다.[* [[치하포 사건]]은 과오이긴 하지만 독립운동가 이전의 활동이다.] 하지만 [[이동휘]]에 우호적인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김구]]만 비판하면서 [[이동휘]] 측의 전쟁범죄에는 침묵한다.[[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2308008|#]] 이런 점에 의하면 [[권희영]] 교수가 지적한 좌편향 문제가 틀렸다고 보기 힘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